Beyond the Archives
by 북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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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오후4시의 희망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그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8
by 북곽 | 2009/11/24 10:49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정희성, 숲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정희성, 동아일보, 1970

* 고등학교 국어 시간.
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출석도 부르지 않고 칠판에 시를 써나갔다.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였다.
선생님은 사람이 시를 외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by 북곽 | 2009/11/19 14:53 | 트랙백 | 덧글(0)
그,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나는 그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라고 말하거나 쓸 때, 대상이 그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와 나는 오랫동안 친구로 사랑해왔다.

최근에, 생활이 무너진 그를 본다.
그는 자주 무너졌고, 거듭 좌절했고,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자정이 가까워 귀가했고, 저녁을 챙겨먹지 못했다면서 늦은 저녁에 반주를 곁들였다. 
정규적인 삶의 스케줄링에 따라야 돈을 벌 수 있는 나는 그가 귀가할 때 쯤
잠들 준비를 했고, 가끔 그와 보조를 맞추다가 다음 날 아침엔 늘 후회했다.

그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는 새벽까지 영화를 봤고, 난 종종 깨어나 헤드폰을 끼고
영화를 보는 그를 봤다.
그의 삶을 걱정했다.

지금은 헤어진 애인이랑 사귈 때 나는 그녀가 내게 하는 일상의 충고,
아니 어쩌면 충고의 일상을 자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런 문제가 쌓이고 부패해서 그녀와 나는 헤어졌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그녀의 충고를 듣고 있던 내 귀를 생각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던 내 귀를.
들려오는 걱정과 충고에 무감각했던 내 귀를.

그와 나는 곧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데
내가 그에게 환멸을 느낄까봐 나는 걱정하고 있다.
안절부절하고 있다.

그와 나는 남녀관계처럼 헤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어쩌면 더 힘들거라고도 생각한다.

그가 걱정이다.
by 북곽 | 2009/11/17 13:54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모란공원
회사 워크숍의 마지막 코스는 모란공원이었다.
모란공원에 오는 날, 늘 하늘은 흐렸고, 오늘도 그랬다.  
햇볕의 기억이 없고, 비나 눈의 기억도 없다.
다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우울한 하늘만 가득했다.

김병곤 선생의 묘 앞에서 묵념을 했다.
김병곤 선생은 현 사료관장과 부부의 연을 맺고 있다가 가셨다.
그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던 권형택 단장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와 김병곤 선생은 대학 선후배이다.

살아있을 때 독재정권과 그 하수인들에 저항하던 가파르던 이념의 모서리가 다 닳아서
저 무덤처럼 둥글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념은 살아있을 때의 이념이다.
죽은 자의 정신을 산 자들이 이어받는 것이라고 선배들은 말했지만,
죽은 자의 무덤을 보며 이념과 실천 각을 세울 수 있는 일은 어려워보였다.
죽음은 개별의 죽음이고, 삶 또한 개별의 삶일 뿐이다.

열사들의 몸은 땅에 다 녹아 없다.
by 북곽 | 2009/11/13 16:28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의 문학 평론집이다. 
갑작기 평론집이 읽고 싶어서 주문했다.
어려웠고, 무언가 집중할 수 없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 그 세상 속에 담겨 사는 인간을 해석할 수 없어도 문학,
그 중에서도 시와 소설에 대한 해석을 보고 싶었다.
명확하게 해부되는 것의 실체에 동의하고 싶었다. 
평론집은 700페이지가 넘었다.  

가장 난해한 것에 집중하면서 가장 난해한 문제를 건너려고 했는데, 집중은 어려웠다.
by 북곽 | 2009/11/13 16:26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회의의 말
회의는 생각을 나누어 사안을 결정하는 다수의 모임이라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생각은 말이다.
생각의 현시가 말이다.

말들이 많다.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말은 숨을 골라 머뭇대는 듯 하다가 확 찔러 들어오고,
어떤 말은 찔러 들어오는 말에 당황하여 터져나오기도 한다.
또 어떤 말은 조심스럽고, 어떤 말은 짧게 결정을 하기도 한다.
어떤 말은 말로 말해지지 않기도 한다.
그런 말은 다음 회의를 기약한다.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잡을 수없는 말들의 향연에 말하는 자의 확신은 더디고
듣는자는 고통스럽다.
말하는자의 말 속에 확신의 골격이 없는 말은 아무것도 움켜쥐지 못한다. 
무력한 손아귀같은 말들이 많은 회의가 줄어야 한다.

회의 시간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by 북곽 | 2009/11/07 21:41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기록



























기록은 찢을 수 있다.
기억은 부분적으로 망각되거나, 왜곡되기도하며 무뎌지고 대체된다.
기록이 기억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해왔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남춘천에서 시작했고, 남춘천에서 끝냈다.
안녕, 남춘천.

by 북곽 | 2009/11/07 21:40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가 쓴 <청춘의 문장들>은 형편없었다.
김훈을 읽기 전과 후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집중하는 일은 어려웠다.
문장이 글로 스미지 못하는 김연수의 책을 읽으며 반대편에서 연필을 쥔 김훈의 손에
돋았을 핏줄이 떠올랐다. 


by 북곽 | 2009/11/05 09:09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북한산
북한산에 올랐다.

알프스의 깎아지른 절벽 대신 오래 그 자리에서 바람을 맞아 닳고 헤진
몇 개의 늙은 바위를 사람들은 봉우리라고 불렀다.
열정, 사랑, 청춘 등 푸른 시절의 가파른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관통해왔을 법한
얼굴을 한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산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늙어버린 육체와 부실해진 무릎을 짚으며 언덕과 비탈을 감당하고 긍정했다.
쉬어 기댈 만한 바위 옆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이 뿜어내는 입김은 아름다웠다.
늙음의 어쩔 수 없음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돌아갈 수 없는 푸르른 육체를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돌멩이를 밟고 산을 끌어 안는 사람들은 일요일에 산에 있었다.

헬기장으로 꾸며진 정상 언저리의 공터에서 사람들은 마른 김밥을 씹었다.
홍어회와 막걸리를 사들고 올라와 먹는다는 이들도 있었는데, 냄새가 고약했지만
저걸 산 위에서 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이 정겨웠다.
사람들은 서로 먹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며 즐거워했다.


산을 내려와 동행한 선생님의 후배를 만나 막걸리를 마셨다.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걸출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PD인데
마누라고 자식이고 다 버리고 북한산 언저리에 살며 날마다 산에 오르고 술을 마시며 살고 있다고 했다.
오십이 넘은 그는 수줍음이 많았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경찰에게 매맞는 게 무서워서 열심히 운동하진 않았다고 담담하게 말할 때,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말하는 한 사내의 입은 정직해보였다.

통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통일이 꼭 그렇지는 않아요"라고 말할 때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울음이 차 올랐고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통일처럼 삶도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었다.
좁은 식당 구석에선 간혹 오줌 지린내가 풍겨 올라왔고 막걸리는 맑았다.

버스를 타고 산을 내려와 지하철 입구로 들어갈 때 오르고 내렸던 산은 꿈 같았다.

by 북곽 | 2009/11/04 21:10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뒤늦은 편지_유하
늘상 길 위에서 흠뻑 비를 맞습니다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떠났더라면,
매양 한 발씩 마음이 늦는 게 탈입니다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당신의 음성도
내가 마음을 일으켰을 땐 이미 그곳에 없었습니다
벚꽃으로 만개한 봄날의 생도
도착했을 땐 어느덧 잔설로 진 후였지요...
쉼 없이 날개짓을 하는 벌새만이
꿀을 음미할 수 있는 靜止의 시간을 갖습니다

지금 후회처럼 소낙비를 맞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예비된 게 없어요
사랑도 감동도, 예비된 자에게만 찾아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게으른 몽상만이 내겐, 비를 그을 수 없는 우산이었어요
푸르른 날이 언제 내 방을 다녀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어둑한 귀가 길, 다 늦은 마음으로 비를 맞습니다
by 북곽 | 2009/11/04 20:47 | 날마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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