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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묻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유를 들었다. 두려웠지만. 내가 왜, 당신은 왜, 라는 물음에 그것은 다만 유령일 뿐이라고 인정할 순 없었다. 마음...이라는 만져지지 않는 그것이 변한 실체(이 또한 얼마나 형용모순!)는 그랬다. 감정의 인과는 잘 성립되지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어보였다. 상처받기 두려워서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불안한 이 사랑을 견딜 수 있냐고 내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바보처럼 객관적이었다. 그녀는 서서히 입을 떼었다. 그녀는 흐느꼈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고 흐르는 얼굴을 오랫동안 들지 못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헤어지자는 그녀를 정작 내가 위로할 땐 기분이 묘했다. 영문을 모르고 빌었다. 알몸으로 이유없이 매를 맞는 기분이었다. 사람은 제 바닥을 보여주기를 두려워한다. 내밀하고 습한 그 곳을. 감정이 변질되었지만 진실과 실체의 고름으로 가득한 바닥을 상대가 인정하지 못할까봐. 자신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한 자는 사랑하면서 내 마음의 바닥을 모두 보여준다. 그래서 갑작스런 이별의 순간에 오히려 그는 속수무책이다. 덜 사랑한 자는 이별의 순간에 바닥을 헤집어 보여준다. 그래서 이별 후에 남겨진 후회는 바닥에 켜켜이 쌓여 부패한다. 그것은 다음에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삶의 순간에 다다라서야 조금씩 덜어낼 수 있다. 다만 Fromm의 말처럼 사랑도 배우고 깨달으려 노력해야 하는 기술의 하나이고, 그 각성 이후에나 가능하다. 배우길 게을리하고, 돋아남과 성장을 위한 새 순의 고통없이 그가 보는 세상은 다만 반쪽의 진실, 반쪽의 세상일 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는 일요일 오후 11시30분에 걸맞게 단 몇 명의 손님을 태우고 달렸다. 내게 몇 개의 형벌이 더 남았을까 가엾은 죄의식을 더듬으며 이제 시작일 뿐인데, 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이지,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 때 난 내 마음조차도 몰랐다. 왜 내가 너를 그토록 가혹하게 찌르고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대체 내가 너, 라고 부르는 너는 누구냐.
네가 나의 밤을 모두 알고 있듯이
나는 너의 푸른 새벽을 알고 있지 소낙비 내리던 그 한낮의 어둠 속에서 우리 꿈구던 아름다운 세상 이제 아무 의미 없어도 꽃잎 날리던 그 허기진 언덕 위에서 우리 말하던 사랑과 자유 이젠 아무 의미 없어도. 조동진, 1993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기 보다는, 세월이 흘렀지만 낡지 않은 노래들을 흥얼거린다. 조동진이나 김광석의 노래속에 든 뼈를 만진다.
될 만한 일들이 어그러지고,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한 순간에 나를 좌절로 몰아넣은 일들.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를 제외하고. 그러니 내게 상처받고 마음 상한 이들아, 걱정하지 말게나. 난 충분히 고통받고 있고, 앞으로 닥칠 것들에 또한 각오를 세웠으니. 당신들의 뜻대로 될거야. 나를 저주한 만큼 난 충분히 받을거야. 그게 순리이니. 세상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세탁기와 같다고 아무개가 그랬거든. 돌고 돈다는 말이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아. 진심이야.
간혹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도 내게 잘 대해줬던 지난 그녀들에 대한 이해할 수 없었던 내 행동,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변질과 거기에 묻혀버린 시간. 이것들을 가지런히 챙겨 가려했는데, 그만두었다. 그래도 소중한 기억으로 정돈하려고 했는데, 멈춰섰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무서워진거다. 인과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일, 정신의 변곡과 마음의 행로를 추스려 주워담는 일, 어릴 적엔 무섭지 않았던 것들, 정신차리지 못했던 시절엔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들, 나이를 먹으면서 꺼려진다. 사람과 사랑, 시간의 경로를 샅샅이 알게 되면, 난 또 무엇을 알게 될까. 삶의 지리멸렬한 실체를 모두 인정하고 싶진 않다. 꼭 다 알아야 하는가. 소개로 만나 두 달 넘게 평화롭게 잘 사귄 그녀가 갑작스레 남긴 이별 통보에 몸서리를 쳤다. 꼼꼼히 캐물어 알아내려 했던 그녀의 변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버렸다. 놓아버렸다. 그나마 다행히 잠시라도 애끓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은 살아있다. 이렇게 살금살금.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결별한다. 딸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신이 나오는 길을 알게 된다. 아기가 나오는 곳이 바로 신이 나오는 곳임을 깨닫고 문득 부끄러워 얼굴 붉힌다. 딸에게 뽀뽀를 하며 자신의 수염이 때로 독가시였음도 안다. 남자들은 딸을 낳아 아버지가 될 때 비로소 자신 속에서 으르렁거리던 짐승과 화해한다. 아름다운 어른이 된다.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그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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